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쿠가와 츠나요시 (문단 편집) == 조선과의 관계 == 그의 치세는 [[조선]]의 [[숙종(조선)|숙종]](1674~1720) 재위기와 일치한다. 《[[조선왕조실록]]》에는 '원강길'(源綱吉: [[미나모토]]노 츠나요시)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《[[숙종실록]]》에서 그가 쇼군직을 승계받은 이듬해([[1681년]] - 숙종 8년) [[조선]]에 통신사를 다시 요청하는 기록이 나온다.[* 《실록》에 의하면 일본에서 [[1666년]](현종 7년)부터 이 때까지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지 않았다고 한다. 아무래도 조선 대기근이라고 할수 있는 [[경신대기근]] 여파도 있었고 [[헨드릭 하멜]] 사건도 원인으로 추측된다.] 재미있는 점은 츠나요시가 [[개]] 덕후였던 것처럼 숙종 또한 상당한 [[고양이]] 덕후였다는 것.[* 고양이 한 마리를 금손이라고 이름짓고 직접 먹이를 주며 키웠다. 심지어 금손의 어미 고양이의 장례식까지 치러줬을 정도.] 또한 [[독도]] 문제로 [[안용복]]이 일본에 가서 일본인들의 불법 조업에 항의하고, 사과를 받아 돌아온 것도 바로 츠나요시가 쇼군으로 있을 때였다. 일부 기록에는 이때 [[안용복]]이 일본의 [[관백]](칸파쿠)을 만나고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. 이게 사실이라면 '''[[에도]]까지 가서 쇼군인 츠나요시를 직접 만나고 돌아온 셈'''인데[* 참고로 당시 조선에서는 관백과 쇼군직을 같은 직위로 취급하였다.] 정황상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다. 《[[숙종실록]]》에 의하면 [[안용복]]이 만났던 인물은 백기주(伯耆州; 호키 국 - [[돗토리 현]])의 [[영주(중세)|영주]]였고,[* 당시 돗토리 번을 다스리던 이케다 가문의 [[고쿠다카]]는 32만석이었다. 메이지 유신 이후 후작 작위를 받았으니 꽤 큰 가문.] 안용복은 일본어가 원어민 수준이 아니었던 데다가[* 어려서부터 [[왜관]]에서 자라서 일본말을 잘하긴 했다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던 모양. 사실은 일상 회화는 문제가 없던 것 같지만 [[존 만지로]]의 예를 보듯 이들은 본래 주류 지식인 계층이 아니였기에 지금으로 치면 기초 학력도 이수하지 못한 셈이고, 당연히 더 전문적이고 복잡한 정치,외교,법률상의 고급 어휘나 전문 용어 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. 안용복도 이런 걸 알았는지 2차로 일본에 갔을 때는 당시로는 전문 지식인 계층인 승려들의 도움을 얻었다.] 일본을 잘 몰라서 백기주를 [[에도]]로 착각하고 있었다. 다만 [[안용복]]의 담판 이후 [[쓰시마]] 측에서 '앞으로 찝적대지 않겠습니다.'라는 문서가 조선 조정에 도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. 유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만큼, [[조선 통신사]]를 접대하는데 가장 많은 돈을 쓴 [[쇼군]]이기도 하다. '''"[[조선통신사]]가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"'''라는 요지의 글이 있다면 그건 주로 츠나요시 때의 이야기. 그러나 이 [[조선통신사]]를 접대하는데 드는 돈은 오롯이 [[다이묘]]들의 몫이라서 [[쓰시마]] 번부터 [[에도]]에 이르는 길의 서일본 방면 [[다이묘]]들이 많이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. 허나 츠나요시 사후에는 상기했듯 <검약령>이 내려졌기 때문에 [[카스테라]][* 일본인들이 기록한 조선인들이 좋아하던 음식 목록에 당당히 들어가있다.] 같은 비싼 음식이나 접대가 사라져서 뿔난 통신사마저 생겼을 정도였다.[* [[1717년]] [[조선통신사]]였던 신유한은 그의 저서 《해유록》에서 병농공상의 야만족 집단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. 이전의 통신사들이 츠나요시의 숭유정책에 감탄했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